2023년 1월 17일, 2년 6개월을 함께 했던 하이퍼쿼리를 퇴사했습니다. 2020년 8월 회사의 다섯 번째 멤버이자 첫 번째 디자이너로 조인했었는데, 제가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 첫 커리어를 시작했던 회사를 떠나려 하니 많이 아쉽기도 합니다.
글로벌 테크 회사, B2B SaaS, 원격 근무. 모든 것이 새로웠던 경험으로 채웠던 2년 반이었기에 그간의 시간을 떠올리며 회고 글을 적어봅니다.
왜 선택했는지
미국 초기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로 원격 근무를 하고 있다고 하면 대체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많이들 물어보곤 했다. 대학생 때부터 해외 취업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IT 기업에서 서비스를 만들고 싶었고, 서비스를 가장 잘 만든다고 하는 미국에 가서 일해보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다. 미국에 직접 가서 일할 기회를 탐색하던 중에 COVID가 시작되었고 현지에 가는 것이 어려워졌다. 대신 미국 회사에서 원격 근무를 할 수 있는 해외 취업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지원할 수 있는 회사 중에서 서비스가 메인인 미국 회사를 선택했다. 데이터 인더스트리가 유망하니 일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처음부터 특별히 B2B SaaS와 데이터 산업군을 잘 알고 택한 건 아니었다.
“그때 얻은 깨달음은 개인의 역량만큼 ‘어떤 파도를 타고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개인이 얼마나 중요한 기회를 얻고 멀리 나갈 수 있는지가 속해 있는 산업과 시장, 조직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성장하고 있는 시장과 산업, 조직에 더 많은 기회가 있다.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도 중요한 역할을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커리어를 시작할 때 알아야 할 것, 엄윤미
글을 읽던 중에 이런 글귀를 보게 되었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역량보다 더 좋은 파도를 타지 않았나 싶다. 아무것도 모르던 주니어였음에도 조직에서 많은 경험과 많은 역할을 해볼 수 있었다.
무엇을 경험하고 배웠는지
하이퍼쿼리를 키워드로 조합해 보면, ‘스타트업 + 글로벌(원격) + B2B SaaS’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많이들 경험하는 일반적인 회사가 아니었기에, 살면서 이만큼 독특한 환경에서 일할 기회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다양한 경험을 했고, 또 배웠다.
1. 글로벌 스타트업에서 Zero to One
우선 글로벌 스타트업에서 Zero to One을 경험해 볼 수 있어 뜻깊었다. Dataframe에서, Prequel로, Prequel에서 Hyperquery로, 재직 기간 동안 두 번의 피벗이 있었는데 피벗 할 때마다 회사의 비전에 맞춰 함께 핵심 기능을 고민하고, 레이아웃을 그려내고, 세부 디자인 과정을 함께 했다.
회사의 규모가 커질수록 구성원의 역할과 책임은 점점 더 세분화되기에 이 정도의 범위를 다룰 기회가 커리어 상에서도 흔치 않으리라 생각한다. 데이터 인더스트리, SaaS 디자인 영역에서 전문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좌충우돌하며 시작해서 힘들기도 했지만 그만큼 의미 있던 시간이다.
B2B, 특수 도메인
우리는 B2C 서비스에 익숙하지만, 생각보다 B2B SaaS의 성장 잠재력이 충분하며 최근 많은 투자가 B2B SaaS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B2C 서비스와 달리 B2B는 회사의 비즈니스 및 수익 개선이 목표이며, 사용자와 구매 의사 결정권자가 분리되어 있어 접근 방식부터 세일즈까지 많은 영역에서 차이가 있다. 또 사용자가 적은 특수한 도메인일수록 글로벌 진출을 해야 충분한 수의 사용자를 확보하고 꾸준히 성장할 수 있기에 B2B 서비스라면 글로벌 진출을 염두에 두고 서비스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알고 나면 두렵지 않다. 1년 회고에 적었던 내용이기도 하지만 B2B, 특수 도메인에 종사한다면 강의를 듣던 유저 인터뷰를 하던 방법과 관계없이 최대한 빠르게 유저와 도메인에 관해공부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배웠다. 잘 알면 알수록 유저의 페인포인트에 공감하고 유저의 입장에서 기능을 만들어갈 수 있고, 결국엔 두렵지 않아 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터 서비스를 만드는 과정은 매번 어려웠다..)
PMF
Product market fit. 2년 반 동안 정말 간절했고 동시에 어려웠던 단어다. 2년 반동안 일을 하면서 PMF를 찾는 것은 정말 쉽지 않고, PMF를 찾기까지의 과정은 꽤나 고통스럽다는 것을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그 기간을 회사와 팀원이 함께 견뎌내기 위해서는 회사의 비전, 그리고 팀원 각자의 내재적인 동기가 얼라인 되어 있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PMF를 찾기까지 초기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가 해야 하는 역할은 리더들의 말과 글을 통해서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비전을 가시화하고, 여러 안을 제시해서 리더들이 끊임없이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또한 ‘Go ship!’ (중요한 기능을 최대한 빠르게 전달)에서 ‘Pixel perfect’ (완성도 높은 경험과 디자인)로, 제너럴리스트에서 스페셜리스트로, 회사의 시기마다 팀원에게 필요로 하는 마인드 셋과 능력도 달라진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2. 원격 근무 회사에서의 문화
왜 글로벌 채용과 원격 근무를 할까?
하이퍼쿼리는 각 팀원이 4개의 국가, 6개 이상의 도시에서 근무하고 있다. 오피스가 따로 없다. 처음에는 오피스 자체가 없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일하면서 원격 근무와 글로벌 채용이 글로벌 스타트업의 전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원격 근무 + 글로벌 채용을 하면, 글로벌 시장에 있는 인재를 제약 없이 채용할 수 있다. 또 오피스를 따로 두지 않기 때문에 임대료 등의 문제에서 자유롭고 정보나 권력의 쏠림 현상도 없다. 코로나 이후로 원격 근무를 필수 조건으로 두고 구직을 하는 구직자가 늘어나는 만큼 원격 근무를 하면서도 글로벌 테크 회사에서 글로벌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은 구직자에게도 큰 장점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자율과 책임
이 두 단어의 의미와 무게를 오롯이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만큼 짜인 대로 하는 것에 익숙하다. 하지만 하이퍼쿼리에서는 각기 다른 국가, 각기 다른 시차에서 일을 하다 보니 일하는 시간과 장소를 전혀 확인하지 않았다. 회사는 감시하지 않고, 직원은 단순히 순종하지 않는다. 회사의 팀원 모두가 스스로 오너십을 가지고 업무를 진행하고 결과로 소통한다. 총 업무 시간에 집착하지 않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 온전히 집중하는 것에 포커스를 둔다. 여기서 기존 업무 환경과 큰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혼자서 하루 루틴을 관리하고 책임진다는 게 어렵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노력하고 적응하면서 이제는 자율적인 시간 관리에 능숙해지게 됐다. 회사에서 배운 것 중 큰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원격 근무 회사의 조직문화 세팅
사실 만나서 일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만나서 일할 때,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거나 대화하고 밥을 먹으면서 쌓아가는 유대감과 소속감을 애정한다. 그러다 보니 초기에는 원격 근무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해 한참 힘들어하기도 했는데, 하지만 덕분에 회사 내에서도 조직문화와 관련된 여러 가지 시도를 주도할 수 있었다. (팀원들이 퇴사할 때 너는 우리의 ‘Chief Happiness Officer’였다고 말해줬는데 울컥했다..)
- Weekly selfie: (이것은 직접 주도한 것은 아니지만) 슬랙에 위클리-셀피 채널이 있어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채널이다. 셀피 채널에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면서 조금 더 가까워지고 회의에서 대화 소재가 되기도 한다.
- Taco culture: 서로 감사를 표현하고 칭찬 문화를 만들기 위해 슬랙 연동 서비스 HeyTaco를 이용했다. 고마울 때마다 슬랙 메시지에 타코 이모지를 함께 보내면, 타코를 적립식으로 쌓아서 분기별로 모은 타코 개수가 가장 많은 사람에게 선물과 함께 수상했다. 원격으로 근무하다 보니 서로에게 감사 표현을 할 기회가 적었는데 이제는 조직 내에서 타코와 함께 감사를 표현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 Team retreat: 미국 보스턴에서, 베트남 호치민 등에서 팀 리트릿을 진행했다. 미국 보스턴에서는 1년 반 동안 일한 멤버들의 얼굴을 처음 보기도 했는데 확실히 얼굴도 보고 같이 밥도 먹고, 대화도 했더니 서로 간의 유대감과 소속감이 많이 생겨나서 좋았다. 이후에 근무할 때도 서로 어색함 없이 묻고 업무 요청도 편해졌다. 원격 근무를 한다면 이렇게 1년에 1~2회씩 전체 팀원, 혹은 가까운 팀끼리라도 만나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 꽤 중요한 일임을 느꼈다.
- Swag: 인사팀, 피플팀은 아니지만 회사의 Swag을 구성하고 제작했다. 맨투맨, 반팔티, 텀블러, 노트, 펜 등으로 구성된 Swag을 만들어 각국, 각 도시에 있는 팀원에게 국제 배송을 했다. 제작과 국제 배송은 Swagup이라는 서비스를 이용했다. 원격 근무를 하다 보니, 화상 면접 후 바로 원격으로 일을 시작해서 이 회사에서 일한다는 소속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은데 이렇게 Swag을 보내주니 내부 팀원들의 만족도가 굉장히 높아서 뿌듯했다.
- 또 이외에도 한 달에 한 번 정기 All-hands 미팅 이후에 소셜 타임을 따로 잡아두어서, 게더타운에 모여서 테트리스도 하고 재밌는 게임을 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원격 연말 파티를 하기도 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 게임을 하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일 외의 모습도 보면서 즐거운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회사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오죽하면 퇴사하는 날도 함께 테트리스 3판을 하고 나왔다! ✌️)
3. 일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의 성장
많이 보고, 많이 쓰고, 생각해 보기. 초반에 서비스를 많이 써보라는 조언을 받아서 정말 많은 서비스에 직접 가입해 보고, 사용하고, 나름대로 생각해 보고, 좋은 점이 있다면 팀과 SNS에 공유하는 작업을 굉장히 많이 반복했다. 처음에는 시간도 오래 걸려서 일주일에 한 번 이렇게 약속을 정해두고 했지만, 나중에는 습관이 되니 평상시에 서비스를 쓸 때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됐다.
많이 보고, 많이 쓰고, 생각해 보기.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 서로의 생각을 나누면서 생각을 보완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서비스를 만드는 디자이너로서 평생 가져가야 할 습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커뮤니케이션
영어로 소통해야 했던 만큼 영어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을 익힐 수 있었다. 처음에는 문서를 읽고 이해하는 데도 시간이 정말 오래 걸리고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데는 더 오래 걸려서 애를 많이 먹기도 했는데, 그래도 언어는 운동과 같아서 꾸준한 노력과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전히 답답한 순간이 많지만, 앞으로도 영어는 놓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보려고 한다.
또 영어 외에도 일을 위한 커뮤니케이션과 마인드 셋을 배울 수 있었다. 필요한 것이 있거나 막힐 때 매니저와 리더에게 적극적으로 요청해서 ‘매니지업’ 하는 것, 또 큰 범위의 태스크가 주어지더라도 계획을 짜고 작은 태스크로 나눠 업무를 진행하고, 중간중간에 필요한 이해관계자와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매니저의 역할
정말 운이 좋게도 2년 반 내내 좋은 매니저와 리더와 함께 일할 수 있었다. 각자의 리더십, 매니징 스타일이 있어서 각기 다른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언제나 믿어주면서 격려해 주시는 리더와 일을 하면서는 믿어주시는 만큼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직설적으로 피드백해 주시는 리더를 통해서는 스스로 부족한 점을 빠르게 캐치하고 부족한 점을 메꾸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또 체계적이고 꼼꼼한 리더와 일을 하면서는 일을 할 때 어떻게 계획을 짜고 진행해야 하는지, 또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일을 하는 내내 좋은 매니저와 리더의 피드백을 통해 성장해 왔던 만큼, 때론 힘이 되고 때론 자극이 되는 피드백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후에는 좋은 피드백을 통해 누군가를 성장시킬 수 있는 리더로 성장하고 싶다.
무엇이 아쉬운지
2년 반을 함께 했지만 회사와 서비스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를 함께 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조금 더 경력이 많고 능숙한 상태였다면 PMF를 찾기까지의 과정에서 어떤 태도로 어떤 노력을 하며 이 시기를 버티고 준비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록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하이퍼쿼리가 더 크게 성장하고 자리 잡는 모습을 멀리서라도 지켜보고 싶다.
또 개선해 보면 좋을 것 같은 부분을 발견하더라도 아직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솔루션과 선택지를 갖고 있지 않아 아쉬웠다. 앞으로 더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상황을 경험하며 해결을 위한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
왜 퇴사하는지, 앞으로의 목표
2년 반동안 원격으로 근무를 해왔음에도 생각보다 나와 잘 맞는 근무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앞으로 서비스와 회사가 성장해 나간다면 정말 기쁘겠지만, 그 안의 내가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어 퇴사를 고민하고 결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단기적으로는 ‘잘, 즐겁게, 오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찾는 것이 목표이다. 원격-대면, 글로벌-한국, B2B-B2C 등, 다양한 업무환경이 있는데 경험을 쌓아가면서 내가 잘, 그리고 즐겁게 오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찾고자 한다. 일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인만큼 즐겁게 오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찾는 것이 내가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한 중요한 키라는 것을 깨달았다.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의 첫번째 여정을 함께 해준 하이퍼쿼리와 팀원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Bon voyage